예술혼을 위하여 (115) - 디스커버리 시대의 유산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7/17 [17:41]

유럽 이베리아 반도의 해가 저무는 쪽 대서양 넓은 바다에 전신의 한 쪽을 적신 나라 포르투갈(Portugal)이 있습니다. 스페인과 국경선을 함께하는 포르투갈의 역사는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고대에서부터 정주한 지역 원주민과 게르만족의 교류를 통한 역사 속에서 고대 로마제국의 오랜 통치를 받았습니다. 서기 395년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정 시대가 동서 로마 시대로 나뉘던 시기에 크고 작은 부족의 많은 변동이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남서부 도시 슈바벤(Swabia)과 연관성을 가진 수에비 족(Suebi)이 슬로바키아, 헝가리 영역에서 활동하는 부족으로 나뉘어 있다가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이동하였습니다.

 

이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하여 오늘날의 포르투갈 지역에 수에비 왕국(Suebi Kingdom)을 세웠던 것입니다. 서기 410년의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수에비 족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동 과정의 정황으로 볼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영역에서 이동한 일족으로 보았던 학자들의 견해가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오랜 이동경로를 통하여 대서양 거친 바다를 안고 있는 포르투갈 영역에 진입한 수에비 족이 바다라는 뗄 수 없는 조상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포르투갈이 탁월한 항해 능력을 가지고 해상 탐험을 통하여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식민지 건설을 시작한 내용과 만나게 되는 부분입니다.


당시 서고트족(Visigoths)이 서 로마제국의 심장을 약탈할 만큼 막강한 세력으로 존재하며 418년 서로마 제국과의 타협으로 프랑스 남서부의 아키텐(Aquitaine) 지역에 거점을 삼아 스페인 영역을 확보하면서 서고트 왕국(Visigoths)을 세웠습니다. 이후 493년 서 로마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수에비 왕국은 585년 스페인 영역의 서고트 족에게 정복되어 711년까지 서고트의 지방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 무슬림에 의하여 718년 서고트족이 정복되면서 스페인 북부 비스케이 만 연안에서 동서로 뻗어있는 칸타브리아 산맥(Cantabrian Mt)을 거점으로 이슬람을 거부하는 기독교도의 아수트리아스 왕국(Asturias)이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기독교 왕국입니다. 이 왕국은 지형적으로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과 고원의 평야지대가 있는 산맥이 가지는 천연 요새의 이점으로 격동의 역사에서 수에비 족과 서고트 족이 정복하려 하였지만 불가능하였을 만큼 천혜의 요새이었습니다. 이러한 아수트리아스 왕국이 후손 분배를 통한 레온(León)과 갈리시아(Galicia)로 나뉜 후 레온 왕국으로 통합된 시기가 910년입니다. 이후 레온 왕국에서 용맹한 전투력으로 포르투갈 군이라는 명칭을 가졌던 세력이 1143년 레온 왕국에서 독립하여 포르투갈 왕국이 세워지면서 1249년 이슬람교도를 정복하고 1255년 리스본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 (주) 수에비 왕국  (중) 아수트리아스 왕국  (우) 포르투갈(Portugal)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포르투갈 왕국이 고대 이후 탐험과 탐사를 통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한 최초의 나라입니다. 당시 포르투갈 ‘주앙 1세 왕’(João I)의 셋째 아들 엔히크 왕자(Henrique. 1394~1460)는 탁월한 항해 능력으로 1418년 북아프리카 모로코 바다에 포르투산투 섬(Porto Santo)과 마데이라제도를 발견하고 1420년 최초의 식민지 사업을 착수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엔히크 왕자를 영국의 대영박물관 고지도 자문을 맡았던 지리학자 ‘리차드 헨리 메이저’(Richard Henry Major, 1818~1891)가 1877년 ‘엔히크 왕자와 네비게이터 그 결과에 대한 발견’이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항해사를 뜻하는 네비게이터(Navigator)라는 별명을 붙여준 이후 버밍엄 대학교 역사학과 ‘레이먼드 버즐리’(Raymond Beazley. 1868~1955)교수가  1895년 ‘네비게이터 엔히크 왕자’라는 저서를 펴내면서 오늘날의 네비게이터가 되었던 내용도 역사가 남긴 이야기입니다.

 

엔히크 왕자는 천문학과 지리학에 기초한 과학적인 항해로 아프리카 서사하라에 위치한 전설적인 공포의 뱃길 보자도르 곶(Bojador, Cabo)을 정복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엔히크 왕자의 항해에서 수집한 자료가 바탕이 되어 해상 강국 포르투갈의 디스커버리 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듯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 1450~1500)가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나라 스페인의 후원으로 출발한 콜럼버스(Columbus.1451~1506)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더욱 경쟁의 불꽃이 타오른 탐험 시대는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 1460~1524)에 의하여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 최초의 역사를 열었으며 1500년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1468~1520)이 브라질을 발견하면서 해양시대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남부 아시아 무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식민지로 만들어 중국과 일본에 최초로 무역사절단을 보내는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수도 리스본 항은 최고의 무역항으로 번성하였습니다. 이에 뒤질세라 스페인의 후원을 받은 탐험가 마젤란(F.Magellan. 1480~1521)이 1519년 지구 일주의 항해에 성공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 불어온 항해시대는 유럽 주요 나라에 긴장의 고삐를 당기게 만들었습니다. 
 

▲ (좌) 엔히크 왕자   (중) 지리학자 ‘리처드 헨리 메이저’ 저서 (  우) 포르투산투 섬(Porto Santo) 출  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상황에서 잠시 당시 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 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1533~1603)이 어려운 국내 상황 속에서 1558년 여왕으로 등극하여 1585년부터 1604년까지 스페인 '필립 2세 왕'(Philip II. 1527~1598) 과의 전쟁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원인은  1492년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후원으로 서인도제도를 탐험한 이후 주요 식민지를 개척한 스페인 영역에서 영국이 불법적인 상업 활동을 하면서 불거진 문제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통치에 있었던 네덜란드의 독립을 선언한 세력에 영국이 지원하면서 전쟁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와의 종교 문제가 얽혀있었으며 그리고 포르투갈과는 후계 문제와 연관된 매우 복잡한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당시 네덜란드는 오랜 양모 산업의 발달로 북유럽의 가장 번성한 무역항을 개설하여 유럽 지역의 중개무역 창구로 발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상무역이 번영하면서 이탈리아 주요 도시를 통한 지중해 무역로와 독일 함부르크를 통한 북유럽 무역로를 활용하면서 네덜란드의 입지가 현저하게 축소되었습니다. 나아가 아시아 지역에서 들여오는 향신료와 특수 품목의 독점적인 무역으로 유럽 경제의 균형이 바뀌어가는 변화가 일고 있었습니다.

 

이에 역사적으로 항해의 바탕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 덴마크와 함께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항해시대에 대응하는 전략이 등장합니다. 이는 당시 전쟁 중이라는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었던 더욱 중요한  전쟁은 경제 전쟁이었음을 확인하는 역사의 내용입니다. 바로 1600년 영국에서 제일 먼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15년 간의 독점 무역권을 허가하였습니다. 이후 1602년 네덜란드와 1604년 프랑스 그리고 1614년 덴마크 동인도 회사가 경쟁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 (좌) 1606년 종인도 회사가 발행한 증권   (중)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우) l 네덜란드 튤립 출처: http://www.maleisie.be     © 브레이크뉴스

 

이중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류사에서 최초로 주식과 채권을 개인에게 발행하여 정식으로 상장된 동인도 회사 ‘VOC’『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설립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21년간의 향료 무역 독점권을 정부가 인가한 이 회사는 형태는 민간기업이었지만 네덜란드 국영기업의 조건과 정부가 행사하는 권한까지도 주어진 막강한 기업이었습니다. 이는 화폐의 발행에서부터 범죄자의 처벌은 물론 전쟁의 권한까지 주어진 기업형태의 정부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막강한 기업이 생겨난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고도의 전략적인 요소가 드러납니다. 이는 국가가 이를 운영하게 되면 분쟁으로 인하여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과 배상의 문제를 차단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식민지 정책의 전략적인 요소가 깔려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인도 회사가 모은 자본금으로 항해와 탐사를 통한 부의 축적과 식민지 운영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항해단 ‘프레더릭 하우트만’(Frederick de Houtman. 1571~1623)이 이끌었던 4척의 배가 인도네시아 자바(Java)에서 원주민에 이어 스페인 항해단과의 충돌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다량의 향신료를 싣고 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과장된 소문이 꼬리를 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수익 관계를 짚어보면 이제까지 알려진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초기의 항해 무역에서 연이은 실패에 따른 손실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요약하여 살펴보면 당시 네덜란드가 독립선언을 통한 전쟁 중에 있었던 상황에서 동인도 회사에 거는 기대가 막중한 점도 사실이지만 민심을 끌고 가야 하는 내용이 더욱 절실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항구는 플랑드르 지역의 양모 산업과 직물산업의 호황으로 몇 배씩 수익을 내는 수혜로 지난 200여 년 동안의 번영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발트 해역의 청어와 스페인의 소금 그리고 곡물 무역이 성행하면서 오늘날의 금융시장의 선진기법인 선물 옵션 형태의 시장이 1530년 무렵부터 시작된 곳입니다. 이는 각 상품의 수요와 공급을 사전에 예측하여 매매하는 시장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발트해에서 들어오는 마리아 선단의 청어 공급권을 가진 주인이 그 권리를 나누어 팝니다. 이후 그 권리를 향후 가격 상승을 예측하여 사전에 매입하는 자와 하락을 대비하여 사전에 매도하는 자의 가격이 조정되어 거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장에 익숙한 까닭에 상당히 투기적 경향이 강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품이 거래되었던 야외 시장에서 최초 투자자에게 판매된 증권이 양도가 가능한 조건이었기에 이를 사고파는 증권 거래가 자연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시장이 활발해지면서 교환소가 생겨나고 열기가 고조되면서 1611년 정식 증권 거래소가 설립된 것입니다. 당시 뜨거웠던 투자의 열기는 정규 증권시장이 마감된 이후에도 야외 시장에서 계속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오르는 시세에 암스테르담의 밤은 매일 축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과장되어 당시 일반 서민들이 투자하여 큰 낭패를 보았다고 알려진 튤립 투기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스코틀랜드의 저널리스트인 찰스 매카이(Charles Mackay. 1814~1889)가 펴낸 망상과 군중의 광기(Madness of Crowds)라는 책에 바탕을 둔 이야기입니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이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1554년 오스만 제국에서 튤립을 비엔나로 선물하였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의학자이며 식물학자인 카롤루스 클로시우스(Carolus Clusius. 1526~1609)가 1573년 비엔나 제국의료원에서 재직 중에 튤립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어 1593년 네덜런드 레이던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재직 중에 식물원을 설립하면서 바이러스에 의한 변종 튤립 재배에 성공하여  네델런드 기후조건에 맞는 튜울립이 재배되었습니다. 당시 튤립은 그 꼿의 빛깔과 크기가 매우 고귀한 꽃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초기 보급 단계에서 상당한 희귀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증권시장의 호황으로 흥청대던 경기 상황과 맞물려 튤립 꽃을 가꾸는 것이 신분의 위상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가지게 되면서 너도 나도 웃돈을 주고 뿌리를 양도받으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형편이 좋은 귀족들이 먼저 튤립 꽃을 선점하면서 ‘튤립 꽃을 가지게 되면 부자가 된다’라는 소문까지 가세하여 증권 시장의 호황과 함께 튤립 꽃바람도 한몫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웃을 수 없는 역사를 안고 21년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동인도회사 의 청산 시기가 다가오면서 네덜란드 정부는 서인도회사를 만들어 동인도 회사의 투자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배당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이어 새로운 신규 투자를 유치하며 증권시장의 활성화를 꽈하여 투자자들의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물론 이러한 암스테르담 증권시장이 선구적인 파생상품의 개발에 대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현대 금융시장의 역사로 남아 이를 바탕으로 자유주의 자본 경제가 이루어진 사실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힘의 크기로 상대를 제압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세계는 힘의 논리로 빠져들어 경쟁적인 식민지 정책으로 인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칼럼은 (116) 식민지와 유물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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