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대학자 다산 정약용 천주교 관련성 심층연구(2)

박관우 역사작가 | 기사입력 2017/08/12 [10:31]

▲ 박관우 역사작가     ©브레이크뉴스

정약용(丁若鏞)은 어린 시절 부친인 정재원(丁載遠)으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웠으며, 불과 4세라는 어린 나이에 천자문(千字文)을 공부하였으며, 더불어 7세에 시를 직접 쓸 정도로 글에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다산(茶山)에게 인생의 시련이 다가왔으니 그것은 바로 모친인 해남윤씨(海南尹氏)가 1770년(영조 46) 향년(享年) 43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1회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해남윤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5대손녀이기도 한데 다산이 한창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정신적인 충격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큰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모친의 역할을 대신하여 주었으며, 그 이듬해인 1771년(영조 47) 정재원은 김화현(金化縣)에 사는 황씨라는 여성을 부실(副室)로 삼았으나 요절하였으며, 그 이후 1773년(영조 49) 서울에 거주하는 잠성김씨(岑城金氏)를 다시 부실(副室)로 삼았는데 이 여성이 바로 다산이 지은 “서모김씨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에 등장하는 서모김씨(庶母金氏)라 할 수 있다. 

 

모친의 죽음으로 인하여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다산에게 서모인 잠성김씨가 마치 친아들 대하듯히 정성을 다하였다는 것인데 “서모김씨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 처음 우리 집에 올 때 용의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머리에 서캐와 이가 많고 또 부스럼이 잘났다. 서모는 손수 빗질해 주고 또 그 고름과 피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바지.적삼.버선을 빨래하고 꿰매며 바느질하는 수고도 또한 서모가 담당하다가 장가를 든 뒤에야 그만 두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자매중에서 특히 나와 정이 두터웠다.

 

위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서모김씨가 다산에게 정성을 다하여 길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모가 다산이 유배중이었던 1813년(순조 13)에 임종하면서 다산은 그 마지막 모습을 함께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이 묘지명(墓誌銘)은 1818년(순조 18) 유배에서 해배(解配)된 이후 고향에 돌아와서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다산으로서는 마치 친어머니 같은 서모김씨의 임종을 함께 하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회한(悔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한 인물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스승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다산의 스승은 누구였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

 

이미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다산은 부친으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공식적인 스승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다산과 특히 우애가 깊었던 중형(仲兄)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수제자(首弟子)인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는 것인데 다산이 스승이 없었다면 부친 이외에 다산의 학문형성에 있어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인가?

 

여기에서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익인데, 그는 다산이 평소에 천재라고 높이 평가하였던 정헌(貞軒) 이가환(李家煥)의 종조부(從祖父)이기도 하다.

 

이익은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평북(平北) 벽동(碧潼)에서 유배중이었던 1681년(숙종 7) 출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부친이 세상을 떠나기 전해에 출생하였다는 점이니 성호는 다산의 모친이 9세에 세상을 떠날 때 보다 더 어린 나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고통을 겪어야 하였던 것이다.

 

흔히 실학(實學)의 선구자(先驅者)라 하면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과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을 일컬을 수 있는데 필자는 성호(星湖) 이익(李瀷)도 선구자중의 일원(一員)으로 평가한다.

 

이와 관련하여 성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권철신을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여기서 성호가 벼슬을 하지 않게 된 연유를 살펴 보면 성호는 불과 2세라는  어린 나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중형(仲兄) 섬계(剡溪) 이잠(李潛)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고 하는데 이잠이 1706년(숙종 32) 노론 김춘택(金春澤)과 이이명(李頤命)이 당시 王世子(景宗)을 위해하려 한다는 상소를 올려 일대 파문을 일으켜 숙종의 친국(親鞫)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결국 장살(杖殺)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익은 이러한 이잠의 죽음을 보면서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는 길을 택하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던 것이다.

 

필자가 이익의 생애에 대하여 핵심적인 포인트를 언급한 배경은 다산이 시대적으로 볼 때 이익의 문하에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이가환과 매형(妹兄)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을 통하여 성호의 유고(遺稿)를 읽은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이익을 사숙(私淑)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숙(私淑)이라 함은 어떤 인물에게 직접 학문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 인물의 생전의 글을 공부하면서 그 가르침을 흠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 역사작가.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저자. 칼럼니스트.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기사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기자에게 전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