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대응방안

중국 당국은 조선족 문제-한반도 통일과 관련된 문제 등에 대한 국가적 차원 대책세우기 시작

최광식 고려대 교수 | 기사입력 2017/12/05 [17:05]

▲ 동북공정 반대 시위 장면.  

아래 원고는 5일, 국제교과서 연구소에서 발표된 내용이다<편집자 주>

 

중국의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는 2002년 2월부터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5년간 추진하고 있다. 이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와 현실문제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학제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중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동북공정’에서 다루는 문제 중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과 발해 등 한국고대사와 관련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우리가 이에 대해 항의를 하고 역사왜곡의 중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역사왜곡 뿐만아니라 영토문제를 비롯한 정치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어 한반도의 장래와 관련된 중차대한 문제이다.
                 

1.  중국의 ‘동북공정’의 배경 및 의도
  

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워 소수민족 정책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9년 동구권이 변화하고, 1991년 소비에트가 해체되면서 국경 지방의 소수민족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이후에는 동북지방에 대한 관심이 더욱 각별해졌다. 1993년 고구려 학술회의에서는 중국학자들과 북한학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더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들이 대거 중국으로 넘어오는 사태가 빚어지자 동북지방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이즈음 동북지방의 연구기관들이 동북지방의 역사와 지리 및 민족문제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보고,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2001년 한국 국회에서 재중동포의 법적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자 중국 당국은 조선족 문제와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된 문제 등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2001년 북한이 고구려의 고분군을 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신청하자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기획하고 추진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게 되면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명분이 사라질 가능성이 많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방해하고, 2003년 봄 오히려 집안시 주변의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신청한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 남북통일후의 국경문제를 비롯한 영토문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북한지역의 정세변화에 따라 북한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비롯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명분을 쌓으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2. 역사왜곡의 내용
  

‘동북공정’에서 한국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에 걸쳐있지만 가장 핵심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고구려로서 전문주제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우리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문제인데 고구려를 고대중국의 일개 지방민족정권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었으나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통하여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단정하여 공식적 견해로 확정하여 버린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몇가지 제시를 하고 있으나 사실에 기초하여 볼 때 수긍하기 어려운 궁색한 이야기들이다. 고구려가 중국영역내의 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이라는 것, 활동중심에 있어 몇 번의 천도가 있었으나 결코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 고구려가 줄곧 중국역대 중앙왕조와 군신관계를 유지하였고, ‘중국’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그 관계를 스스로 끊지 않았다는 것, 고구려 멸망후에 그 주체집단이 한족에 융합되었다는 것 등을 내세워 고구려가 고대중국의 지방민족정권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와 고려 및 조선족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고구려의 고씨와 고려의 왕씨는 혈연적으로 다르며 시간적으로 250년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역사적 계승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족원은 중국사서에서도 예맥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부여와 백제와 같은 종족이다. 조공과 책봉을 가지고 종주국과 복속국과의 관계라 주장하지만 이는 동아시아의 고전적인 국제질서상의 외교적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한편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을 중앙정권과 지방정권과의 내전이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멸망하였으며, 이는 분명히 동아시아의 국제전이었다. 고구려의 유민이 당나라로 끌려갔기도 하였지만 신라나 돌궐로도 갔으나 대부분은 그 고구려 지역에 남아 발해를 건국하는 주체세력과 주민구성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발해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고려는 계승성이 없다고 강변하지만 고려는 고구려를 부흥한다는 계승의식 때문에 국호를 ‘高麗’라 한 것이며,  고구려의 도읍 서경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만약 성씨가 같지 않아 계승성이 없다고 한다면 중국의 왕조는 한족과 북방민족이 번갈아가며 중원을 차지하였으므로 계승성이 전혀 없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3. 중국 기록상의 고구려
 

그러면 과연 고구려를 한국사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삼국지로 잘 알려진 위․촉․오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三國志>>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오환과 선비 및 동이에 대한 기록이 입전되어 있다. 그리고 소위 동이전에는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 마한, 진변, 왜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찬자인 진수는 <<三國志>>에서 오환과 선비 및 동이를 삼국사(魏․吳․蜀)가 아닌 다른 민족의 역사로 인식하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을 가지고 만약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면 오환과 선비 및 동이뿐만 아니라 남만과 북적 및 서융이 모두 중국사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동이전에 입전되어 있는 고구려와 아울러 부여, 동옥저, 예, 마한, 진한, 변진, 그리고 왜(일본)까지도 중국사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三國志>> 동이전의 기록방식은 중국 사서에 계속 이어졌으며, <<周書>>의 경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이역열전에 입전되어 있다.
  

그리고 <<三國志>> 위서 동이전에 부여, 고구려, 예, 마한의 경우 제천대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10월에 제천의례를 지내는데 거국적인 대회이며, 동맹이라 하였다. 명칭으로 볼 때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동맹제는 제천의례인 동시에 국조신에 대한 제의로서 양면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늘의 자손인 동명에 대한 제사의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천대회가 부여와 예 및 삼한사회에서도 이루어졌다.
 

부여에서는 제천대회를 영고라고 하였는데 제사의 시기가 은정월로 기록되어 있다. <<後漢書>> 동이전에는 납월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는 음력 12월의 이칭이라 한다. 그리고 ‘납(臘)’은 제사명으로 짐승을 수렵하여 선조를 제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부여의 영고는 수렵의례와 관련성이 있다고 하겠다. 제사대상은 하늘(天)로 되어 있으며, 그 규모는 국중대회라고 되어 있다. 즉 제의의 대상신은 천신이며, 그 제사의례의 규모는 국중대회로 고구려와 같이 거국적 행사였음을을 알 수 있다.
 

동예에서는 제천의례를 고구려와 같이 10월에 행하였다. 동예의 경우도 고구려와 같은 시기이므로 오곡의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밤낮으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이는 부여와 삼한의 제의과정과 마찬가지이며, 특히 하늘에 춤을 춘다는 의미의 ‘무천’이라는 제의명이 돋보인다.
 

삼한의 경우 제의명칭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성격은 고구려나 부여의 제천대회와 마찬가지이다. 오월에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 제사를 지냈는데 음주가무를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며, 춤을 수십명 단위로 추었으며 이를 10월 농경을 마치고도 하였다. 국읍에서 천군이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별읍에서 무당이 귀신을 섬기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볼 때 제후국이 아닌 다른 독자적인 정치체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천의례를 지낸 고구려와 부여 및 동예, 그리고 마한은 중국과 다른 천하관을 가진 독립국가였다는 것이 중국인이 남긴 당시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4. 한국 기록상의 고구려
  

한편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천제지자(天帝之子)’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으며, 모두루묘지명을 보면 ‘일월지자(日月之子)’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다. 이는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으로 이를 통해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표현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가 중국과 같은 황제국으로서 주변 나라의 정치체를 ‘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한편 사대주의사학자라고 비판을 받는 김부식이 올린 진삼국사기표를 보면 “신라와 고구려 및 백제의 삼국이 정립하여 능히 예로서 중국과 교통한 때문에 범엽의 한서라든가 송기의 당서에 다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사서는 자기 국내에 관한 것을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실리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여 신라와 고구려 및 백제를 포함하여 삼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으며, 이들 삼국은 중국과 다른 외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三國史記>> 권 50 중 신라본기는 12권, 고구려본기는 10권, 백제본기는 6권으로 편성하여 삼국의 역사를 하나의 역사 체계속에서 인식하여 서술하고 있다. 열전에서도 을지문덕, 을파소, 명림답부, 창조리, 연개소문 등 고구려 인물을 신라와 백제의 인물들과 함께 입전하고 있다. 또한 제후국에서 사용하는 세가(世家)라는 표현이 아니라 중국사서에서 사용하는 본기(本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고려사}에서는 본기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고, 세가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본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三國遺事>>에는 기이 2권에 우리의 역사체계 속에 인식하고 있는 왕조의 조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고조선, 위만조선, 마한, 2부, 72국, 낙랑국, 북대방, 남대방, 말갈 발해, 이서국, 오가야,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변한 백제, 진한 등이 기록되어 있어 <<三國遺事>> 찬술 당시 이들 국가가 하나의 역사 속에 체계화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동부여와 북부여와 아울러 고구려를 졸본부여로 인식하고, 백제의 경우 남부여라고 하여 부여계통의 공통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남쪽 뿐만 아니라 북쪽, 그리고 만주지역에 부여족이 세운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백제의 경우 시조묘의 제의 대상이 온조나 비류가 아니라 동명으로 동명묘라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부여와 고구려 및 백제는 혈연적으로 하나의 계통이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 속에서 함께 인식한 것은 이승휴의 <<帝王韻紀>>와 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帝王韻紀>>에는 전조선기, 후조선기, 위만조선기, 한사군 및 열국기 다음에 고구려기라는 편목을 설정하고 그 다음에 고려기를 설정하고 있다. 더구나 천제가 태자인 해모수를 보내 하백의 삼녀와 결합하여 동명왕이 출생하였으므로 천신의 손자이며 하백의 사위라 기록하고 있다. 하늘(天帝)의 손자라는 것은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건국자의 계보를 밝히는 것이다. 또한 고조선에서 고구려를 거쳐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체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계보는 이규보의 <東明王篇>에도 잘 나타나 있다. 김부식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삼국의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편찬하였으나, 이규보는 동명왕의 이야기를 괴력난신으로만 보지 않았다. 당시 민중들에게 구전되어오던 설화와 ‘구삼국사’를 통하여 <<魏書>>와 <<通典>>에 상세히 기록되지 않은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과 함께 동명왕의 사적을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전해야할 민족정신의 지주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서 등을 통하여 고구려를 신라와 백제와 함께 삼국으로 인식하고 삼국시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고구려사가 한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양국시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만리장성 이남을 자기의 역사 영역으로 하고 있다.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한족이 자리잡고, 북쪽에는 북방민족이 자리 잡고 역사를 영위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북방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차지하여 중국의 역사를 주도하기도 하였지만 중국인의 기본적 인식에는 북방민족을 막기 위한 방책이 만리장성인 것이다. 한편 고구려에는 천리장성이 있어 중국과 경계를 하고 당나라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천리장성은 중앙정권과 지방정권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국가(고구려)와 국가(당나라) 사이의 경계를 위해 쌓았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광개토왕대왕과 장수왕대에는 고구려가 영락(永樂)과 연가(延嘉)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오히려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고 중국 왕조의 연호를 그대로 습용하였다. 이를 통하여 볼 때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조공국이 아니라 중국왕조에 대응하는 동방의 패자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三國史記>>를 백 번 보는 것보다 ‘광개토왕비’를 한번 보는 것이 낫다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5. 역사 왜곡에 대한 대응방안
 

‘동북공정’의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의 일부로 하기 위한 역사왜곡은 일본역사교과서 왜곡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역사왜곡사건은 검인정 교과서 중에 하나인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왜곡은 중국의 정부기관이 나서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훨씬 크다. 더구나 고구려사 뿐만아니라 발해사와 고조선사까지 왜곡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2,000년 밖에 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게 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먼저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와 근거를 확실히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대한 대응논리를 개발하고 사실을 왜곡한 부분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왜곡문제에 대해 장기적으로 대비하기 위하여 중국의 동북지방(滿洲)에 대한 역사와 지리 및 민족문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야 한다. 여태까지 우리는 만주지역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였으며, 이에 대한 연구는 일천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편 ‘동북공정’이 시작된 직접적 계기이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북한이 UNESCO에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었다. 만약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면 고구려의 역사가 마치 중국의 역사인 것처럼 오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남과 북 어느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이므로 남북공조로서 고구려의 역사를 지켜낸다면 남북공조의 모범적 사례가 될 것이다. 2004년 7월 1일 소주에서 열린 세계유산총회(WHC)에서 북한의 고구려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구려유적도 세계문화유산으로 함께 등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가 매우 중요하다. 중국은 이를 계기로 일사양용론(一史兩用論)을 더욱 강화하여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학술적 인해전술과 물량공세에 의한 역사왜곡에 대하여 우리는 국제화와 정보화를 통한 효과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또한 북한, 중국, 일본, 미국, 유럽 등의 학자들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고구려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결과물을 영어로 출판하는 국제적 활동을 추진하여야 한다. 2004년 9월 16일과 17일 개최되었던 ‘고구려의 한국사적 위상’ 고구려사 국제학술세미나와 같은 행사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물론 고구려뿐만 아니라 고조선 및 발해를 비롯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논저를 영어로 출판하여 국제사회에 알려 인정을 받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2005년 미국 Havard대학과 독일 Hamburg대학 및 일본의 Kyushu 대학에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제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와 같이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모여 국제학술회의를 갖고 그 결과물을 출판하는 것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인들이 올바로 인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전시회를 열면서 학술 심포지움을 갖는다면 세계인들에게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6. 고구려연구재단의 활동
 

한국은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 상응하는 연구기관을 설립하여 중장기적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대 동북아역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국민과 국제사회에 홍보하는 학․민․관 네트워크를 구축하여야 한다. 2004년 3월 1일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을 중심으로 관련자료 수집, 중장기적 기초연구, 학문후속세대 양성, 민간전문기관 육성, 중국의 역사왜곡 실태 홍보 등의 제반 임무를 추진하였다.
 

고구려연구재단은 고구려사 뿐만아니라 고조선사와 부여사 및 발해사를 포함하는 한반도 북방지역의 역사를 연구하고, 한반도 북방지역의 영토문제와 민족문제에 대한 연구도 함께 수행하였다. 다양한 기능과 이무를 복합적으로 수행하여야 하므로 정부나 민간 가운데 특정 부문이 주도하는 것보다는 정부와 학계가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시민단체가 측면 지원하는 학․민․관 공동 연구센터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연구재단은 북방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홈페이지를 활용하여 국제적으로 중국의 역사왜곡과 그 문제점을 알리고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홍보하였다.
 

아울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북한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하여야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사실 우리보다도 더욱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다. 그러나 북핵문제나 에너지 등 경제원문제 때문에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당국자나 학자들을 만나보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고 있으며,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강하게 밀어 부칠테니까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남쪽에서 강하게 밀어 부쳐주기를 바라고 있다. 남과 북이 손을 잡고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처한다면 중국은 멈칫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이문제가 그동안 수면밑으로 내려갈 수 있었던 데에는 남과 북이 공동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고구려 고분벽화를 공동 조사하고, 안학궁을 공동 발굴하는 등 남북의 공동작업이 중국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결과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고구려연구재단이 출범하여 남북 공동 대응을 한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라고 하겠다. 이러한 남북 공동의 학술행사는 남북의 학술사에도 길이 남을 중요한 업적이라고 하겠다. 동북아역사재단도 남북의 공동 대응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이다. 고구려사를 비롯한 우리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올바로 정립하여야 이문제도 잘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네티즌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내용과 그 문제점’들을 인터넷을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 여론화를 주도해나간다면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더 이상 역사왜곡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고구려의 복식을 활용하여 개량한복을 만들어 입고 다닌다거나, 벽화에 나오는 역동적인 문양을 그래픽 디자인이나 산업디자인에 활용하는 방안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건물을 지을 때 설치 미술로서 건물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모티브를 활용한 미술작품을 설치하는 것도 한 예가 될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고구려 고분벽화의 모형관을 만들고 고구려인들의 의상을 입어보게 하는 등 고구려 테마파크를 만드는 방안도 강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국은 한국인이 고구려의 역사와 함께 만주의 영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데 의구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고구려의 과거 영토 보다는 고구려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데 더욱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맺 음 말


우리는 고구려연구재단을 통하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학술적 대응을 하여 왔다. 그러나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출범하면서 고구려연구재단이 해체되었다. 따라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학술적인 대응 뿐만아니라 정책적 대응도 함께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미 고구려연구재단에서 2년간 연구하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응한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인력을 잘 활용하고 필요한 분야의 연구인력을 더욱 보강하여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국의 역사 교과서 문제이다.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전에는 중국의 역사교과서에 고구려는 세계사 교과서 속에 신라와 백제와 함께 삼국의 역사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2005년에 출간된 이른바 ‘실험본 교과서’에는 한국의 역사가 전근대 부분이 모두 빠지고 1948년부터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교과서를 배우는 학생들은 한국의 역사를 1948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시정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실험본 교과서는 그야말로 실험적으로 몇 군데 학교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정본 교과서’가 아니라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은 매우 안이한 자세라고 하겠다. 교과서가 완성된 이후 항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교과서가 완성되기 전에 계속 시정을 촉구하여야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중국사 교과서에 기술하는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최광식, 2004,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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