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201) - 소리의 신 김대환 이야기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8/06 [17:17]

지난봄 인사동에 있는 김대환 박물관을 찾아갔었다, 음악가 김대환에게 30년간 연습실을 후원한 유재만 대표가 그 현장을 보존하여 고인의 유품과 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공간을 안내한 유재만 대표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8시간이 넘게 연습하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음악가 김대환의 삶이 배어있는 드럼 앞에서 그가 사용하였던 6개의 스틱을 들고 유 대표는 잠깐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열 손가락에 스틱을 끼우고 양손에 피가 끈적거리도록 드럼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회상을 이어가다 끝내 목이 메었다.

 

김대환(金大煥. 1933~2004)의 아호는 흑우(黑雨)이다, ‘어둠 속에 내리는 비’의 뜻을 가진 ‘흑우’(黑雨) 는 세상에 내리는 비(雨)를 때림(打)으로 인식하여 그 울림이 모든 것을 일깨운다는 의식을 추구한 음악가이다, 이는 흥에 취하여 절로 나오는 신명의 몸짓으로 녹아 내린 소리이거나 시골 장터의 막걸릿집에서 즉흥으로 두드려대는 젓가락 장단과 같은 소리가 세상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같이 자유로운 소리이며 이는 곧 음악의 원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좌로부터) 흑우 김대환의 드럼 / 유정염 대표, 유재만 대표,필자/ 김대환의 유품  인사동 아리랑 명품관 2층  김대환 박물관에서  ©브레이크뉴스


  
가왕 조용필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 세계에서 전환적인 의미가 있는 김대환을 회상하며 드럼 이외에는 말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혀끝을 가위로 잘라버리고 폐쇄된 연습실에서 개구멍으로 주는 식사를 하며 연습으로 일관한 무서운 집념을 가진 음악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사실 김대환은 자신의 혀끝을 두 번이나 잘라낸 특유의 집념과 선의 경지에 이르는 집중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김대환의 혹독한 집중력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어온 그의 성장 과정과 특수한 경력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시대 상황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33년 충남 태안에서 전국을 다니며 무면허 치과 의료 행위를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다섯 살 나이에 어머니가 재혼했다, 이후 인천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던 외삼촌 슬하에 양자로 입적되어 강대환으로 성장하였다, 바로 프리재즈 아티스트 강태환과는 호적상으로 형제이며 실제로는 이종사촌이다. 나름 넉넉한 형편이었던 외삼촌 슬하에서 가족으로 성장하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예술적 감성 이외에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김대환의 어린 시절 꿈은 언제나 군악대였다, 말쑥한 제복에 큰 북을 두드리며 나팔을 부는 행진을 지켜보며 허공을 두드리고 손을 말아 빈 나팔을 불어대던 소년 김대환이 인천 동산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브라스 밴드에 들어갔다.

 

학교 밴드 활동을 하며 트럼펫을 불다가 타악기로 바꾸었던 그는 당시에 음악에 대한 뛰어난 감각이거나 천부적인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력이 남보다 뒤처진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늘 품어온 꿈을 향하여 피나는 노력 이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일깨워 자다가도 북을 두드리고 트럼펫을 불었다, 이러한 김대환을 따르며 좋아하였던 강태환이 그를 따라 음악을 좋아하면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이후 김대환은 1946년 미 8군 무대의 브라스 밴드에 드럼연주자로 데뷔하여 잠시 활동하다가 1950년 경찰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1951년 북파 공작부대인 8240 켈로(KLO)부대에 차출되어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 이 부분에 대한 말을 무척 아꼈다, 그것은 그만큼 엄격한 보안 사항으로 그가 경험한 특수한 훈련과 환경에 대한 언급을 시대 상황이 허용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후 그는 창설된 공군군악대에 차출되었다, 공군군악대에서 복무하며 클라리넷에서부터 트럼펫과 트롬본 그리고 색소폰에 이르기까지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던 예고에 재학 중이던 동생 강태환을 부대로 불러 군악대원들에게 특별지도를 받게 하였을 만큼 강태환을 아꼈다, 오랫동안 공군군악대 생활을 하던 그는 1963년 공군상사로 예편하여 록 밴드 ‘애드 훠’(Add 4)의 드럼연주자가 되어 신중현과 함께 미 8군이 아닌 동두천 미군 부대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김대환과 신중현의 만남은 우리나라 대중 음악사라는 다리에서의 만남과 같은 의미가 있다, 1938년생인 신중현은 1933년생인 김대환보다 5살 아래이다. 그는 16세 나이에 독학으로 기타를 공부하여 1955년 미8군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를 통하여 데뷔하였다. 그는 재즈에서 팝과 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뛰어난 감성으로 연주하며 미8군 무대에 널리 알려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이는 김대환이 군악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제한된 음악과 함께 오랫동안 활동하였지만, 신중현은 당시 세계적인 음악의 흐름에 대한 가장 접근성이 좋았던 환경의 미8군 활동을 통하여 현장감 있는 음악 활동을 해온 차이가 있다.

 

이는 엄밀하게 당시 김대환이 오랜 군 생활을 예편하고 세상에 나왔을 때 그의 음악적 감성을 신중현이 헤아렸음을 의미한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김대환이 ‘애드 훠’(Add 4)의 드럼연주자가 되었을 때 무대 연주가 끝난 후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도록 요청한 악기 창고에 들어가 쓰러지도록 연습하여 신중현에게서 ‘드럼에는 김대환 이상은 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혀를 자르며 연습한 사실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신중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선구적인 지평을 열어온 명실상부한 거인으로 록 음악의 대부이며 살아있는 증인이다. 오늘날 우리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세계무대에서 한류라는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바탕의 출발도 바로 신중현이라는 감각적인 혜안과 열정이 없었더라면 과연 가능한 것인지를 우리는 깊게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2009년 12월 세계 최고의 일렉트릭기타와 앰프 장비 회사인 미국 펜더사(Fender)가 신중현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하여 아시아 뮤지션으로는 최초이며 세계에서 6번째로 ‘신중현 헌정 스트라토 캐스터’(Shin Chong-hyun dedicate Stratocaster)라는 명칭을 가진 명품 기타를 헌정한 사실에서 그의 세계적인 위상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난해 2017년 미국의 명문 버클리음대가 신중현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하여 한국인 최초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당시 학위를 함께 받은 인물을 보면 세계적인 흑인 가수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와 포크 음악의 서정성을 승화시킨 가수 ‘루신다 윌리엄스’(Lucinda Williams) 그리고 혁신적인 기타리스트 ‘토드 룬드그렌’(Todd Rundgren)과 그래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음반 예술산업 아카데미’(Recording Academy)의 ‘닐 포트노우’(Neil Portnow)회장이 명예박사 학위를 함께 받았다.

 

이와 같은 신중현과 함께 활동하던 김대환은 1964년 그룹 ‘애드 훠’(Add 4)를 떠났다, 이후 미 8군 공연 맥키(Macky)쇼단을 거쳐 기타리스트 '이진'이 이끌었던 ‘바보스 그룹’에 잠시 활동하다가 1965년 KBS 악단과 1966년 MBC 악단을 거쳐 1967년부터 68년까지 동남아 순회공연과 월남 위문공연을 다녀왔다, 이후 1970년 초 신중현이 이끌었던 그룹 퀘션스(Questions)에 합류하여 잠시 활동하게 된다, 이후 1970년 후반 김대환이 ‘김트리오’ 를 결성하면서 가왕 조용필이 합류하였다. 

 

이 무렵 우리나라 대중음악과 문화는 실로 폭발적인 Go-go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1967년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군부정권이 1969년 3선 개헌(제6차 개헌)이라는 역사적인 불법으로 1971년 대통령에 오르면서 1972년 종신대통령을 목표로 한 유신헌법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군사 독재정권에 저항한 젊음의 표현이 담긴 문화가 Go-go 문화이다, 

 

우리의 대중문화에서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Go-go 문화가 음악적으로 보면 매우 모호한 내용이 많다, 그것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Go-go 음악 자체가 특정한 장르로 분명하게 정립되었던 장르가 아닌 다양한 음악과 시대의 감성이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Go-go 음악은 춤과 음악이 동행한 장르로 Go-go 춤은 그 뿌리는 엄밀하게 캐나다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식민지이었던 캐나다 퀘백 지역에서 프랑스 민요음악에서 파생된 경쾌한 리듬의 프랑스 포크 음악이 발달하였다, 이와 같은 활기찬 리듬에 예전의 허리 중심의 동작으로 추던 트위스트와 달리 넓게 팔을 활용하는 자유로운 동작으로 추는 춤이 생겨났다, 이에 고고 전문 디스코텍(Boîtes à Gogo)이 생겨나면서 1966년 캐나다 출신의 여가수 ‘미셸 리차드’(Michèle Richard)가 ‘Les Boîtes à Gogo’을 발표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아프리카 흑인 공동체에서 음악클럽 Go-go가 생겨난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이때 1965년 미국의 알앤비 그룹 스모키 로빈슨 앤드 더 미러클스(Smokey Robinson And The Miracles)가 발표한 ‘고잉 투 어 고고’(Going To A Go-Go)와 펑키 사운드를 시대의 리듬으로 정착시키며 Go-go 음악을 열어간 ‘척 브라운’(Chuck Brown. 1936~2012) 등은 고고 음악의 선구자들이다. 이는 재즈와 래그타임에서 컨트리와 포크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리듬이 모여 로큰롤이라는 강을 이루었듯이 Go-go 음악 또한 로큰롤의 율동적인 리듬과 펑크와 블루스와 힙합에 녹아내린 라이브를 중시한 시대의 음악이었다,

 

이와 같은 Go-go 음악은 춤을 동반한 음악으로 클럽(club)과 디스코텍(Disco teques)으로 유래된 공간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공간은 1886년 오픈된 최초의 클럽 ‘웹스터 홀’(Webster Hall)에서 시작되어 클럽문화가 생겨나 1900년 무렵부터 레코드 자동 재생기인 ‘쥬크박스’(juke box)에 동전을 넣어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들었던 공간이 1920년경까지 성행하였다, 이후 금주법이 시행되면서 사라진 공간이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밴드가 등장하는 나이트클럽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러나 엄밀하게 클럽문화와 Go-go 문화의 차별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살펴보면 오랜 역사를 가진 파리의 댄스홀과 같은 뮤직홀에서 나이트클럽 (night club)과 디스코텍(Discoteques)으로 발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에 1947년 파리에 세워진 디스코텍(Discoteques) ‘위스키 고고’(Whiskey à Gogo)를 그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1958년 미국 시카고에 최초의 디스코텍 ‘위스키 고고’(Whiskey à Gogo)가 세워졌으며 뉴욕에는 1962년 세워진 페퍼민트 라운지(Peppermint Lounge)와 맨해튼 54번가에 ‘아서’(Arthur) 디스코텍이 문을 열었다. 이후 1964년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와 1966년 워싱턴 DC 조지타운에 디스코텍 ‘위스키 고고’(Whiskey à Gogo)가 프랜차이즈로 연이어 문을 열었다, 이와 함께 1963년 영국의 호텔 사업가 ‘마크 벌리’(Mark Birley)가 버클리광장에 회원제 VIP 나이트클럽 ‘애너벨스’ (Annabel's)를 열었던 내용도 Go-go 음악과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영국의 호텔 사업가 ‘마크 벌리’는 영국 왕실 역사상 가장 많은 초상화를 제작한 초상화가 ‘오즈월드 벌리’(Oswald Birley)의 아들이다.

 

이와 같은 Go-go 음악과 함께 불어왔던 문화의 변화는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가져왔다, 먼저 그룹 음악에서도 시대의 흐름으로 부상한 Go-go 음악을 중시하는 파와 정통음악을 고수하려는 그룹이 엇갈렸으며 각 그룹의 뮤지션 사이에도 이러한 견해가 다르게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1970년 말 김대환이 결성하여 가왕 조용필을 영입한 그룹 ‘김 트리오’가 1972년 해체되었던 원인 또한 이러한 내용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좌) 신중현/ (중) 강태환/ (우)고 김대환 생전 모습 자료제공- 유재만 대표     ©브레이크뉴스

 
당시 김대환은 1971년 3월에 한국 연예협회 그룹사운드 협회가 만들어지면서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78년 이종사촌 동생 알토 색소폰의 강태환과 트럼펫 최선배와 함께 프리 재즈밴드 ‘강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면서 즉흥적인 ‘프리재즈’ 음악을 추구하였다, 1985년 일본 도쿄에 공연을 시작으로 큰바람을 일으키면서 미국과 유럽 등으로 많은 순회공연을 열었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강 트리오가 1988년 해체되면서 김대환은 솔리스트로 돌아왔다, 그는 솔리스트 초창기에 드럼과 팀파니와 같은 서양 타악기를 사용하다가 북이라는 하나의 악기로 모든 연주를 해냈다, 이때 열 손가락에 6개의 스틱을 들고 현란한 드럼을 구사하던 기량을 바탕으로 다양한 도구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무한한 소리를 선보였다. 1994년 이러한 솔로 타악의 첫 음반을 발표한 다음 해 1999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음악 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열었다.

 

이와 같은 김대환의 전환적인 음악의 장이 열리게 된 계기는 이종사촌 동생인 강태환의 영향이 크다. 강태환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헤아려 보살폈던 김대환 형에게 강태환이 천재적인 색소폰 아티스트가 되어 김대환 형의 프리 스타일에 대한 잠재된 감각을 일깨웠다. 이는 사전에 약속된 화성적 코드가 아닌 즉흥적인 연주 능력에서 개별적인 라인을 독자적으로 끌어가면서 연주자 개개인의 천재적이거나 잠재적인 감성의 하모니를 탄생시키는 프리재즈 스타일의 삼차원적인 연주를 통하여 김대환이 가졌던 감각과 감성을 일깨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강태환이 김대환의 타악 드럼과 영혼의 울림을 전한 트럼펫 최선배와 함께 ‘강 트리오’를 통하여 보여준 프리재즈에 담긴 감성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는 김대환이 솔리스트로 활동하며 자신의 음악 세계에서 추구한 감성이 바로 천재 아티스트 강태환이 깨운 새벽바람과 같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김대환 그는 소리의 신이었다, 그의 솔리스트 공연을 되돌아본다. 덩그러니 놓인 큰 북과 드럼, 그리고 신비롭게 덮인 채로 놓여있는 또 하나의 악기가 있었다, 혼신의 신명으로 두드려대는 공연이 끝나는 즈음이면 덮인 포장이 열리면서 등장하는 특수 조립한 할레이 데이비드슨 오토바이가 있었다. 이내 오토바이 시동이 걸리면서 지축을 흔들며 굉음을 내는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공연이 끝난다. 생각은 듣는 이의 몫이다. 

  
인사동 박물관에는 그의 생전에 가장 심혈을 들여 작업한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넣은 ‘백미실물세서’(白米實物細書)에서부터 다양한 ‘세서미각’(細書微刻)’작품과 서예작품이 전시되어있다, 10년간을 매달려 1985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1990년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된 작품에 담긴 의미는 6.25 한국전쟁을 맞아 북파 공작부대로 차출되어 실로 상상할 수 없는 극기의 특수 훈련을 받았던 그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이 없고서는 그와 같은 집중력이 불가능한 까닭이다, 이러한 신의 경지에 오른 집중력으로 소리를 헤아린 그는 소리의 신이라는 평가를 안고 2004년 3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은 이와 같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서 소리의 신 ‘김대환’과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과 그리고 국민가수 ‘조용필’에 이르는 시대를 빛낸 대중 예술인들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체계적인 연구와 자료의 보존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술(Art)이라는 어원을 헤아리면 구원과 치유를 만나게 된다. 시대의 거울과 같은 대중예술을 추구하며 역사를 동행하여온 이들의 역할과 업적은 바로 예술(Art) 이라는 뜻에 담긴 시대의 애환을 매만져온 구원과 치유의 대명사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학 해당 학과에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대중 문화사에 대하여 전문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후진 교육에 틀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정부 유관 부처는 이러한 사실을 헤아려 이제라도 단순 기록물 보존과 같은 조처가 아닌 이들의 흔적과 역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이를 후세에 전하여 그 역사적인 평가를 맡겨야 할 것이다.

 

나아가 오늘날 세계를 휘도는 자랑스러운 한류의 바람이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열정과 신명으로 평생을 바쳐온 이들의 눈물어린 삶이 빚어낸 바탕임을 뒤를 잇는 후진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 칼럼은 자연을 머금은 화가와 세계 속의 숨결 Sita Chay(최보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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