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사료 공개>민군 7천명이 황석산성에서 왜군 4만8천명 박살내다!

<기고문>백성의 전쟁, 정유전쟁 당시 ‘황석산성 대첩’ 전모 밝히는 글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19/02/11 [17:00]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 소장의 편저서. ©브레이크뉴스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은 정유전쟁 당시 1597년 8월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 경상남도 안음현, 거창현, 함양현, 합천현, 삼가현, 초계현, 산음현 등 7개현의 노약자 부녀자 등 피난민 7천여 명이 7년 임진전쟁 중 가장 많은 일본의 지상군을 궤멸시킨 전투로 당시 일본의 실세 120만 5천석의 영지를 가진 히로시마(廣島)성주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이하 7만5천3백여 명 중 4만8천3백 명이 사라진 전투라고 일본인들이 인정한 전투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의 조선수군의 재건과 9월16일의 명량대첩을 가능하게 하였고 풍전등화인 조선을 구하여 7년 임진전쟁을 종료시키는 결정적인 전투다.  황석산성에서 4만8천3백명이 전사 내지는 부상자가 되었고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 두 장군들이 부상으로 8개월간이나 기동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 되어 지휘권을 상실한 그를 두고 일본인들은 모리데루모도가 떠돌이 유군(遊軍)이 되었다라고 표현을 했다.

 

이것이 그들이 저지르는 결정적인 실수다. 유군이라는 말은 부상으로 지휘는 못하지만 전투현장에는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임진전쟁은 태생적 신분사회인 조선의 양반사회와 총칼을 다루는 능력으로 신분을 구분하는 일본의 능력제일주의 신분사회가 충돌한 것으로 능력으로 신분을 결정하는 일본이 승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황석산성 전경 / 동문에서 정산까지의 화강암 절벽.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연구하는 것은 조선총독부와 식민사관에 의하여 역사적 진실이 심각하게 왜곡되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다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일본인의 긍지와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군인도 아닌 부녀자 노약자들에게 궤멸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을 후손들에게 전달 할 수 없었다.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총칼을 든 헌병을 앞세워 조선의 역사책들을 모조리 수거하여 조작하고 수정이 불가능한 것은 태웠다. 

 

▲황석산성 북문과 정상 1190M 정상을 휘감는 구름과 안개. ©브레이크뉴스

▲황석산하 심진동 용추폭포.  ©브레이크뉴스

▲황석산하 화림동 농월정.  ©브레이크뉴스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을 패잔병이 되어 전주성에 입성한 병력인 27,000명으로 일치를 시켜 조작하는 등 황석산성 대첩의 흔적을 지웠다. 

 

황석산성 순국선열들에 대하여 제사를 모시는 황암사당을 불태우고 제례행사를 못하도록 강제하였고 안음현청을 헐고 안의초등학교를 세웠고 1914년 3월1일 당시 군(郡)이었던 안의군(安義郡)을 거창군과 함양군으로 분할하여 안의면으로 강등을 하고 행정권을 말살시켜 강력한 저항을 했던 황석산성의 정기가 자력으로는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복수를 하였고 조선과 일본의 후손들이 기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황석산성 대첩은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억울한 역사가 되었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으나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말처럼 7만5천3백여명을 궤멸시킨 백성들의 저항의지와 전투의지를 말살시키는 역사전쟁을 일본은 100여 년 전에 이미 시작을 했는데도 우리는 100년이 지난 아직도 그들이 심은 식민사관에 세뇌가 되어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주성에서 북진을 하여 조명연합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아야 할 일본우군이 황석산성에서 궤멸되어 북진을 못하자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이 북진을 하는 20여 일간 전라도 특히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과 명량전투를 준비하는 지역에 일본군이 없는 무주공간이 되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전쟁의 주력인 일본지상군이 8월18일 황석산성에서 궤멸되고 전투물자를 보급하는 수군이 9월16일 명량대첩에서 궤멸됨으로써 풍신수길이 그 스트레스로 10월부터 헛소리를 시작하여 다음해 7월 17일에 죽음으로써 일본군이 더 이상 전쟁을 지속 할 수 없도록 하여 조선을 지키고 7년 임진전쟁을 종료시키고 동양3국의 역사적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이러한 황석산성 대첩이 잃어버린 전투가 된 것은, 조선에서는 부녀자, 노약자, 농민, 가노(家奴) 등 누가보아도 군인으로서는 오합지졸인 7천여 명이 5일간의 전투에서 열배도 넘는 일본정규군 7만5천3백명을 궤멸시켜 배달민족의 긍지와 자부심, 자존심을 지킨 가장 자랑스러운 전투지만 조선에서는 양반들이 참전한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들추어지지를 못했고 일본에서는 통일전쟁에서 다져진 역전의 용사요 정규군이었고 우군대장은 당시 일본의 정계에서도 가장 실세인 오대노(五大老)이며 1백20만5천석의 영지를 가진 히로시마(廣島) 성주 막강한 모리데루모도가 이끄는 7만5천3백 명의 대군이 조선의 부녀자 노약자들에게 궤멸이 되었기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한다.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 소장과 편저서인 '백성의 전쟁'  ©브레이크뉴스

특히 남원성에서는 5만명의 일본군이 벤 코가 3,726개인데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한  일본장군들이 보고한 코는 조선백성군 7천명보다도 더 많은 40,799개로 남원성의 열배가 넘는다. 이는 황석산성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코를 벨 수도 없는 조선군보다도 베기가 훨씬 쉬운 죽은 일본군 동료들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료들의 코를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마구잡이로 베어 스스로 궤멸된 증거요 흔적이다. 

 

비도덕적이며 부끄럽고 창피한 전투가 되었으며 일본인의 긍지와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한 전투라 후손들에게 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황석산성 전투는 감추어 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은 올림픽의 기원이 된 아테네군 1만명과 폐르샤군 2만 명이 싸우는 마라톤 전투 보다도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967명이 전사한 이스라엘의 마사다 전투보다도 더 처절한 전투로 조선인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총으로 쏘고 칼로 찢어 죽이고 더하여 코를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먹거리고 분해하는 세계의 전쟁사상 가장 잔인한 전투다. 기원전 14세기 이스라엘이 다섯 부족과 대적한 전투에서 「태양이 멈추는 기적이 일어난 전설적인 기브온 전투」보다도 동료들의 코를 베어 일본군이 스스로 궤멸되는 더 기적적인 전투가 바로 황석산성 대첩이다. 

 

여기에 안음현감 곽준과 함양현감 조종도, 거창좌수 유명개 장군과  피바위 전설의 옥녀부인 등 7천여 부녀자 노약자 농민 사냥꾼들이 1190m 험악한 산중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희생정신,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랑의 힘이 일본군 7만5천3백명을 궤멸시킨 백성군의 힘의 원천이고 황석산성의 정신이다. 물을 끓이고 기름을 쏟아 붓던 아낙네, 활을 쏘던 청장년, 돌이라도 던지며 저항을 하던 노약자들 그날의 울부짖음과 용트림, 아우성이 산맥을 따라 화강암 절벽에 그날 그 흔적이 그대로 지금도 뚜렷하다!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 이역만리 심심산골 황석산성 화강암 산등성이  골짜기에서 동료들에게 코를 빼앗긴 일본의 젊은이 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할 수 있는 <통곡의 화강암>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얼굴에 두 개의 구멍이 뻥 뚫린 일본인 에비(殪鼻)가 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seonhopark<shp676@daum.net


*필자/박선호. 황석연사연구소 소장. '백성의 전쟁'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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