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너무 사랑, 심장에 총을 쐈다!”

<10.26 증언> 김재규 친동생 김항규 생전 인터뷰 완벽공개

문일석 기자 | 기사입력 2007/04/25 [09:10]

<1980년 5월 24일은 김재규가 사형 당한 날이다. 만 27년이 지났다. 이 기사를 재수록한다.>

박대통령, 너무 사랑했기에 총으로 살해했다"

김재규 친동생 김항규의 생전 인터뷰로 그 내막을 들여다본다.

10.26사건때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대통령을 살해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18년이라는 장기 통치자 박정희 전대통령을 제거한 김재규 전앙정보부장을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고조돼 왔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살해한 살인범이지만 장기독재 체재를 확실하게 끝냈고, 민주주의를 간절히 원했다는 점 때문에 살인범보다 양심범이었다는 사실이 부각돼 온 것.

김재규의 친동생 김항규(1929-1997)는 10.26이후에 10여년 간 태백산의 한 사찰에 은거해 왔는가하면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의 김재규 본가에서 칩거해오다가 1997년 5월30일 작고했다.

그는 1995년 10월 6일, 1995년 11월12일 2차에 걸쳐 본 기자와 산자로서의 마지막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작고하기 전 밝히지 못했거나 본인이 생각해온 10.26관을 최후로 토로했었다. 김재규 친동생 김항규의 가족에게 "나는 세상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김항규의 육성증언을 보자.

"세상에 부끄러운 일 절대하지 않았다" 유언

김항규는 대통령을 살해한 형을 두었다는 것 때문에 1979년 10.26 이후 험한 세상을 살았다. 현불사에 입산, 승려는 아니지만 10여년간 수도자의 일을 걸었다. 그 이후 죽기전까지는  서울 서북구 동소문동에 소재하는 조그마한 한옥의 3평 남짓한 비좁은 방에서 생활하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기자의 김항규 단독 인터뷰는 어렵살이 이뤄졌었다. 그는 "침묵해왔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입을 열 필요성이 있어 할말을 남기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10.26은 사전에 계획했던 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으면 말해달라.

▲내가 형님을 만난 것은 10.26이 일어나기 15일 전쯤이었다. 밤이 늦은 시간까지 대화를 나눴다. 그때 형님은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을 알았는데, 박대통령은 절대로 물러설 성격이 아니다"면서 거사의지를 내비쳤다.

나는 "집안 사람이 형님만 있는 게 아니다. 만약 형님이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린 어찌되겠느냐"고 말했었다. 이때의 대화로 보면 형님은 박대통령을 제거해야 된다는 생각을 거사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와 같은 대화가 오간 뒤부터 형님은 10.26이 일어날 때까지 나와의 면회를 거절했다. 형님의 10.26은 무엇이 되려는 생각에서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다고 본다.


형님은 박대통령을 목숨을 걸고 사랑했다. 역설적이지만, 형님이 박대통령을 너무 사랑했기에 박대통령이 발전시킨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박대통령을 제거했던 것이다.

남녀간에 서로 사랑하다가 더 이상 사랑을 나눌 수 없을 때 죽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심중(心中)이란 말이 있다.  형님이 박대통령의 마음 한가운데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발전시킨 나라가 잘못되고, 그 국민이 피해를 본다면 불행한 일이기 때문에, 박대통령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런 최후의 용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형님은 최후진술에서 "제 나이 한 10년이나 20년 끊어 바치더라도  좋으니까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놓자, 나는 대통령의 참모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고급관리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 충성하고 이 국민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 결국 나의 명예고 지위고 목숨이고 또 대통령 각하와의 의리도, 이런 소의에 속한 것은 한꺼번에 다 끊어 바친다, 대의를 위해서 내 목숨 하나 버린다, 그래서 원천을 때려 버렸다"고 말했다.

형님을 비판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어찌됐든 형님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형님은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민간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군인 출신 정치인들이 국가를 이끄는 시대는 지났다고 간파했다.

형님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부마사건의 현장에 직접 나갔었다. 부마사건을 현장 시찰한 형님의 결론은 민란(民亂)이었다. 10.26사건이 없었다면 서울에서 민란이 발생, 엄청난 희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대통령의 제거는 거대한 국민적 희생을 사전에 막은 대 사건이었다고 본다.

▲김재규 친동생 김항규씨. 그는1997년에 사망, 본지 기자와 최후의 인터뷰를 가졌다.   ©브레이크뉴스

-박대통령을 제거하고 대통령에 오르기 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김재선) 이런 주장은 신군부가 만들어서 유포시킨 내용이었다. 나는 오빠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을 때까지 뒷바라지를 한 사람이다. 오빠는 체포된 뒤 다급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했다. 다급한 메시지란 "혁명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전국민에게 빨리 알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국선 변호사들은 오빠의 다급한 목소리를 외부에 전달하는데 소홀했다. 나 자신은 오빠는 독재정치를 무너뜨린 혁명가였다고 믿고 있다.

"사랑하기에 살인했다"

김항규는 10.26 이후 태백산 현불사에 10여년간 은둔하며 세상을 보냈었다. 그는 그 동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한 내용의 일부를 공개했다.

-김재규 전중정부장은 당시 김영삼총재와 어떤 사이였는가?

▲10.26 사건, 큰 비밀은 아니지만 그 동안 말못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밝혀두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형님은 박정희대통령을 너무너무 사랑했기에 총으로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大人)의 길과 소인(小人)의 길은 그런 점에서 다르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대통령을 살해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살해하는 것과 똑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형님은 사형대에서 떳떳하게 목숨을 내바쳤다.

1979년 10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사건 무렵이었다. 나는 가끔씩 형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형님은 "박대통령이 김영삼 총재를 없애라고 지시했다"면서 난감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김녕김씨로 김영삼 총재와 동성동본이었다. 항렬로는 김총재가 조카뻘이었다.

형님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해온 김총재를 내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없앨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었다. 형님은 김영삼총재의 제명사건(79.10.4)이 있기 하루전 약수동 정보부장 공관에서 김총재를 만났다. 씨족관념이 강했던 형님이 김총재를 초청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의 깊은 내막은 잘 모르지만, 형님은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김총재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형님은 "김녕김씨 씨족을 어찌 내가 죽일 수 있느냐? 그것도 한국 민주화의 기둥인 사람을"이라면서 개탄한 것을 옆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형님은 10.26이후 1심 2회공판(12월8일)에서 김영삼 총재 때문에 박대통령을 쏘기 위해 손에 총이 갔다고 했다. 인용해 보겠다.

"각하, 김영삼총재는 이미 국회의원으로서 면직됐습니다.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그걸로써 본인을 처벌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국민들이. 또 이 사람을 사법조치까지 하면 같은 건으로 2중 처벌을 하는 인상을 줍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곧이어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이렇게 제가 콱 흥분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손에 총이 갔습니다....그러고는 그냥 손에 총이 가서 "이 버러지 같은 친구"하면서 차지철을 쏘고 대통령 각하를 쏘았습니다."

김재규 최후유언

▲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육군교도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김 정 중정부장은 어떤 유언을 남겼는가?

▲80년 5월24일 사형을 당했다. 그런데 하루 전, 나는 온 가족을 데리고 형님의 면회를 갔다. 형님이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큰아버지는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절대하지 않았다. 나의 최후진술을 자자손손 전해다오.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 형님은 이 말을 마치고 난 후 나에게 "이제야 마음이 편안하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사형집행이 임박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 대화가 오간 다음에 이떤 일이 있었는지를 소개해 줄 수 있는가?

▲나는 형님과의 이별을 위해 이별가를 불렀다. 일본노래 나니와시(浪花節)였다. "내 눈을 보라/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사내들끼리의 뱃속 아니랴/ 한 사람쯤 나 같은 바보가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도 눈을 뜨지 못한다" 는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이다.

내가 부른 이별가를 듣던 형님은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로 "음"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형님은 내 귀에다 대고 "항규야, 나 내일 영원히 이별한다. 너만 알고 있어라"고 말한 뒤 내 등짝을 있는 힘을 다해서 때렸다. 이것이 형님과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었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이 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루머이다. 내가 사형 당한 형님의 시신을 만지면서 얼굴을 확인하고 새옷을 입혔다. 이런 설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루머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의 탐정 소설을 거의 빠짐없이 읽었다. 아마 1천여권은 탐독했을 것이다. 혹시나 다른 사람의 시체로 바꿔치기 할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가지고 온 몸을 살펴보았는데 형님이 틀림없었다. 형님의 목에는 교수형 시킬 때 목에 걸었던 밧줄 자욱이 선연하게 나 있었다.

-장사 지낼 때도 참관했는가?

▲물론이다. 보안사에서 남한산성을 묘지로 지정해 주었다. 장례를 하기 하루 전에 남한산성을 올라갔다. 나는 산을 올라가면서 남무묘법연화경을 독경했다. 그리고 "부처님 , 형님이 묻힐 묘지 하나를 주십시오"라고 소원했다. 이때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나무의 늘어진 가지들이 "여기요, 여기요"하는 듯 흔들거렸다. 그래서 나는 느티나무 곁을 가리키면서 "여기를 파주시오"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그곳에 형님의 시신을 장례 지냈다. 무덤이 비어 있다,  죽지 않고 어딘가 살아 있다는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한통의 박정희 친필편지

김항규는 박정희대통령이 1978년 10월19일자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보낸 친필편지 한통을 삶이 끝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 편지는 이 편지는 박대통령이 김항규의 행동을 정보부장인 김재규에게 질책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친필로 써보낸 편지의 서두는 "근간 입수된 첩보 중 김부장의  측근 또는 가족에 관한 건 몇가지 통보하오니 사실여부 알아봐서 시정 조치토록 하시오"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그는 이 편지로 인해 혼쭐났다고 회고했다. 김항규는 이 편지를 잘 보관해왔다. 법률상으로는 살해주범인 형이 죽인 살해자 박정희이지만, 두 사람 간의 마지막 악연의 끈을 보여주는 문건이라고 했다.

이 편지를 펼쳐 보이며 눈물을 짓던 김항규는 "내가 좋아하는 설송스님의 법문이 있다"면서 그 내용을 읊조렸다.

 "바람없는 천지엔 꽃이 필 수 없다(無風天地無花開)/ 이슬 내리지 않는 곳엔 열매도 없다(無露天地無結實)"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는 한국 역사에 어떤 꽃과 열매를 남겼을까?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바람과 이슬처럼 사형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김재규의 친동생 김항규는 "꽃과 열매"라는 화두(話頭) 하나를 기자에게 말해주곤 세상을 떠났다.
moonilsuk@korea.com

 

김재규觀 어떻게 달라졌나

"김재규는 안중근과 같은 인물" 일부서 추앙?

전두환 정권 김재규를 서둘러 사형시켜
최근들어 "김재규는 민주화 인사" 추앙

김재규는 박정희 살해사건으로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됐다. 그후 7개월 만인 1980년 5월20일 사형 판결을 받고 그 4일 후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구속된 지 7개월이라는 짧디 짧은 기간만에, 또한 사형판결을 받은 후 4일이라는 기간 안에 그의 생명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유신의 심장을 쏘았을 뿐이다"

신군부가 김재규에게 사형을 내린 것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후에 대통령이 되려 했다는 내란음모죄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이 혐의 사실을 줄곧 부인했었다.

그는 1980년 1월24일 최후진술에서 "박대통령은 나 개인에게 있어 사적으로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나는 나의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독재 체제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각오하였다"면서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 희생을 줄이는 것이 나의 대의였다.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똑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대통령을 살해한 것은 "대통령이 될 야심에서가 아니라 유신의 심장을 쏘았을 뿐이다"고 호소했다.
김재규는 이 문제에 대해 "유신 체제는 그 자체가 꽉 짜여진 억압과 폭력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풀 수 있는 길이 없었다"면서 "자신은 생명을 걸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것을 타파하고 회생시킬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1980년 1월28일 항소이유 보충서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박 대통령을 제거했다”고 피력, 정치적 소신에 따른 양심범임을 주장했다. 그가 박정희를 살해한 구체적 이유가 담긴 항소 이유서 일부를 옮긴다.

“본인이 결행한 이번 10·26(1979년) 거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혁명이었습니다. 5·16과 10월 유신을 거쳐 완전하게 말살시켜 놓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놓기 위한 혁명이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은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국기요, 국시입니다. 6·25전란을 통하여 많은 고귀한 피를 흘리면서 지켜온 것이었습니다. 4·19 의거의 희생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자유민주주의가 완전히 말살되고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이 10월 유신이었던 이상,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함은 당연한 명제입니다.

둘째로 자유민주주의 회복은 전 국민이 열망하는 것입니다. 유신체제 7년 동안 이 체제에 대한 도전과 항거는 온 국민의 생각 속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79년 10월의 부마사태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박대통령이 영도하는 정부안의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 각료 공무원과 당원들조차도 겉으로 드러내지만 못하고 있었을 뿐 내심으로는 유신체제의 철폐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다 같이 원하고 있었습니다."

"안중근과 같은 인물"

김재규는 재판을 받는 도중에 자신이 스스로 죽는 자결을 원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내가 스스로 나의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10.26 사태는 오로지 나의 책임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고 말했다.

당시 김재규의 재판이 진행될 때 사회 일각에서는 그의 구명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강력히 규제, 김재규의 사형에 대한 반발이 없도록 탄압했다.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전의원)는 "신군부는 왜 80년 5월17일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는가? 어떤 이들은 신군부가 5월20일 김재규에 대한 사형 판결이 내려지면 대대적인 데모가 행해질 것으로 보고 이를 미연에 피하기 위하여 거사했다고 분석하는 이도 있다. 국내에서 김재규 장군과 그 부하들에 대한 구명 운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면서 "김수환추기경도 구명 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모든 가톨릭 교회가 서명 운동에 나섰다. 정치인으로는 윤보선 전대통령을 비롯해 재야출신이 앞다투어 서명하고 구명 운동을 했다. 고인이 된 함석헌 옹이나 문익환 목사 등도 모두 도왔다"고 밝혔다. 김재규의 구명 운동은 미국 등 해외에서도 거세게 일어났었다.

그를 구명해야 된다는 논리는 윤보선 전대통령의 발언에서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윤보선은 "김재규 장군은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의사로 봐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재규는 사형 당하기 하루 전날인 5월23일에 동생 김항규와 면회하는 자리에서 유언을 남겼다. 김항규는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가족이 면회를 갔다. 그때 형님은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나는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나의 최후진술을 자자손손 전해 다오.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그 이튿날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재규의 진실이 국민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서둘러 사형 집행을 했다는 것. 또한 강신옥 변호사에 따르면, 처형된 5년후에야 사형을 판결한 판결문을 받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전대통령을 내란 행위로 다스렸다. 1심판결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으며, 끝내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선물로 1997년 12월에 특사를 받아 출감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수감됐을 때 구명 운동이 거세지 않았다. 그만큼 민중의 지지가 없다는 반증이었던 셈. 오히려 박정희 전대통령을 유신 정권의 권좌에서 끌어내린 김재규는 이등박문을 쏘았던 안중근과 같은 의사로 대접했던 사회적 분위기와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다. 최근 들어, 김재규의 평가하는데 있서 "민주화 인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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